커버이미지

PC통신, 판타지의 요람이 되다! 웹소설 입문 시리즈(2)

등록일2017.04.10 10:12 조회수1806


이미지 = 영화 <엽기적인 그녀>



완판녀 전지현의 경제효과는 무려 3천억 원이라고 한다.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 전지현을 스타덤에 올려준 게 바로 PC통신문학이다. 2001년 개봉한 전지현, 차태현 주연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약 5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하면서, 당시 많은 남성들이 전지현을 이상형으로 꼽는 ‘전지현 신드롬’을 일으켰다. 세간을 놀라게 한 사실은 영화의 원작이 한 평범한 청년이 PC통신에 재미삼아 올린 자신의 연애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PC통신은 아마추어 작가들의 등용문이었다. 『엽기적인 그녀』처럼 유머 장르도 인기였으나, 대중성이 가장 폭발하게 된 장르는 단연 판타지였다. 당시 국내에 생소했던 판타지는 PC통신을 만나, 여러 밀리언셀러를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PC통신문학이 무엇인고?

이미지 =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PC통신이 생소한 독자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80년대 말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PC통신은 인터넷의 조상님으로, 컴퓨터에 통신회선을 연결하여 자료를 주고받는 통신 방식이다.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 이렇게 업체 3대장이 있지만, 이 글에선 모두 PC통신으로 총칭하겠다. 당시 컴퓨터는 서민들이 구입하기 힘든 사치품이었고, PC통신의 요금이 한 달에 10만원이 넘게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1992년 최저시급 925원을 받는 사람의 연봉이 약 200만 원이었던 정황을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질 액수다.

PC통신이 지금의 인터넷보다 이용자 수는 적긴 했지만,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양과 속도에는 뒤지지 않았다. PC통신에는 힙합·와인·게임과 같은 관심사 별로 나눠진 동호회 게시판들이 있었는데, 지금의 유명인들이 다수 활동했다. 가수 데프콘과 정인은 나우누리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한 바가 있다.

그 중 유머 게시판에서 아마추어들이 쓴 소설이 인기를 얻게 되어 연재를 시작한 게, PC통신문학의 출발점이다. 통신문학은 문학계에 새바람을 일으켰고, 복거일, 하재봉 등 기성문단의 작가가 PC통신에서 연재하는 초유의 사건도 있었다. 90년대는 그야말로 PC통신의 시대였다.


오컬트 판타지가 흥할 수 있었던 세기말

90년대는 PC통신처럼 집단지성의 힘이 출현했지만, 동시에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O월 O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이비 교주의 예언을 철석같이 믿고, 직장을 그만두고 집까지 파는 신도들이 많았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불안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려는 심리를 이용하려드는 음모가 횡행하던 때였다.

자연스레 초자연적인 힘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콘텐츠가 인기를 끌었다. 초능력자, 투명인간 등 당시 초자연 코드는 세계적인 이슈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았다. 예를 들어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의 90년대 방영분에는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고발하거나 UFO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에피소드들이 많았는데, 방영 당시 30%가 넘는 고시청률을 기록했다.

여느 매체보다 유행에 민감했던 PC통신 역시 공포/SF게시판이 인기였다. 주로 시중에 떠도는 괴담을 올리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무기 개발을 연구하던 서울대 출신의 공학도 이우혁이 있었다. 1993년 7월, 하이텔문학관의 ‘납량특집란’은 한 유저가 올린 오컬트 판타지 소설로 인해 들썩였다. 훗날 천 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퇴마록』의 시작이었다.

오컬트는 초자연적 현상을 탐구하여 원리를 알아내고, 더 나아가서는 재현하려는 행태를 가리킨다. 그 현상에는 앞서 언급했던 UFO나 종교적 주술이 해당된다. 세기말에 인기를 끌었던 오컬트 성격이 강한 『퇴마록』은 시작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기에 충분했다.


판타지의 아버지, 『퇴마록』

『퇴마록』은 웹 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판타지 역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퇴마록』을 통해 판타지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현재까지도 사랑과 인정을 받는 스테디셀러이기 때문이다.

『퇴마록』의 방대한 세계관은 동서양의 종교·역사·주술 등 많은 분야를 아우른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서양 중세 판타지를 답습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이우혁 작가의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덕이다. 작가는 서양의 미신과 전설은 물론이고, 『용재총화』, 『어우야담』과 같은 한국의 고서까지 섭렵했다. 따라서 『퇴마록』 하나만 읽어도, 세계의 판타지 소설들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다. 가령 늑대인간이나 악마와 한국의 퇴마사들이 일전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한일전을 관람하는 것 마냥 퇴마사를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입체적인 캐릭터 역시 『퇴마록』의 인기 요인 중 하나다. 신부·무술인·주술사·화신(化身)으로 구성된 4명의 퇴마사들의 사고는 이분법적이지 않다. 본디 초자연적 픽션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세상이 혼란을 겪게 되는 전개로 흐른다. 당연히 히어로는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원흉을 징벌하려 한다. 그러나 선악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 법. 혹여나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이 실은 가해자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퇴마사들은 의심과 편견을 경계하고, 원혼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국내·세계·혼세·말세로 총 4편인 『퇴마록』은 전개가 거듭될수록 철학적 물음에 다다른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달리는 기차 앞에 철로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바로 앞 선로에는 인부 5명이, 오른쪽에는 1명이 일을 하고 있다. 

당신 앞에 선로를 바꿀 수 있는 레버가 있다. 그대로 둘 것인가, 바꿀 것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도덕적 딜레마다. 퇴마사들 역시 이와 비슷한 난제를 받는다. 한 생명이냐, 세상의 멸망이냐? 전 세계의 능력자들은 퇴마사들에게 택일할 것을 강요한다. 세상의 종말을 불러온다고 알려진 적 그리스도라고 의심받는 아기를 퇴마사들이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를 노리는 악마들과 능력자 연합군이 공격해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퇴마사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2001년 말세편 6권을 끝으로 『퇴마록』은 완결이 났다. 8년에 걸친 대장정의 끝이다. PC통신을 통해 일반인이었던 이우혁은 스타작가로 거듭났고, 『퇴마록』은 PC통신문학을 세상에 알렸다. 이보다 더 좋은 궁합이 있을까.


PC통신문학, 판타지의 요람이 되다.


“우리는 별이오.”

“별?”

“무수히 많고 그래서 어쩌면 보잘 것 없어 보일 수도 있지. 바라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도 있소. 영원의 숲에서처럼 우리들은 서로를, 자신을 돌보지 않는 한 언제라도 그 빛을 잊어버리고 존재를 상실할 수도 있는 별들이지.”

  • 드래곤 라자 中 


이우혁 이후에도 PC통신문학은 걸출한 판타지 작가를 여럿 배출해냈다. 국내 130만 부, 일본 50만 부, 타이완 30만 부 도합 21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는 1996년부터 하이텔에서 연재된 작품이다. 드래곤에게 줄 보석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소년 후치의 이야기로, 흥미진진한 전개와 뛰어난 문체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한국 판타지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드래곤 라자』의 영향력은 컸다. 작품의 특징인 1인칭 시점과 오크의 울음소리를 차용한 판타지 소설이 양산됐고, 2004년에는 태성출판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상업적 인기와는 별개로, 작품성에 있어선 은연중에 폄하 받던 장르문학이 거둔 쾌거였다.

나는 너를 만났어. 긴 세월을 뛰어넘어 이곳까지 오게 된 행운.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어.

  • 세월의 돌 中 


하이텔에 이우혁, 이영도가 있다면, 나우누리에는 전민희가 있다. 1999년 나우누리 SF&판타지 게시판에서 연재된 『세월의 돌』이 기록한 통신 조회 수 400만은 아직도 전설로 회자된다. 섬세한 묘사와 서정적인 문체로 큰 사랑을 받은 『세월의 돌』은 책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PC통신문학이 성공을 거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PC통신을 그리워하는 작가 이우혁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PC통신의 장점으로 자발적인 정보의 생산을 꼽았다. 실제로 동호회 중심의 게시판 유저들은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기를 즐겼다. 이처럼 창작열이 높은 분위기였기에 양질의 글이 나올 수 있었다.

더불어 유저들은 원석을 발견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기에 하마터면 전혀 다른 길을 걸을 뻔 했던 이우혁이 우리 곁에 작가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PC통신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은 입소문을 타 책으로도 성공했다. 실험으로 치자면, PC통신의 유저들은 훌륭한 표본 집단인 셈이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PC통신의 시대가 저물고, 판타지 소설 시장에도 암흑기가 찾아왔다. IMF 이후 가벼워진 지갑 사정과 대여점의 출범으로 출판시장은 한겨울을 맞게 됐다. 대여점 시스템이 만들어낸 양산형 판타지소설의 범람은 전체적인 질적 하락을 불러왔다.


[입문시리즈 3편 - 인터넷 소설 집필이 가장 쉬웠어요] 바로보기 ☜

오후미디어의 더 많은 기사 보기  ☜

# 현재 인기 토픽

플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