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성=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차가운 바람이 불면 문득 생각나는 음식 중 하나가 꼬막이다.
짭조름한 듯하면서도 달고,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쫄깃한 맛. 오죽이나 맛있었으면 '밥 도둑'이란 말이 나왔을까.
살이 오를 대로 오르고, 맛 또한 깊을 대로 깊어지는 겨울이 오면 꼬막은 식도락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된다. 꼬막 음식은 늦가을부터 초봄까지가 제철이다. 낙지가 그렇듯이 꼬막도 겨울철에 살이 탱탱해진다. 추워야 알이 꽉 차고 영양가도 한껏 높아진다.
때도 때이지만 어디서 먹느냐 역시 그에 못잖게 중요하다.
꼬막의 본향처럼 여겨지는 대표적 고장이 바로 전남 보성의 벌교. 언제부턴가 '꼬막' 하면 '벌교', '벌교' 하면 '꼬막'이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둘은 천생연분이 돼버렸다.
벌교를 낀 여자만(순천만)은 곱고 드넓은 갯벌이 넉넉하게 펼쳐져 꼬막과 같은 해산물의 생태여건으로 그만이라 할 수 있다.
◇ 소설 '태백산맥' 덕에 순식간에 치솟은 성가
꼬막 맛을 보기에 앞서 벌교가 그 본고장처럼 여겨지게 된 내력부터 살펴보자.
꼬막이 벌교의 향토음식이 된 데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공이 지대하다. 1980년대 중반에 발표돼 문단을 뒤흔들었던 이 작품의 주요 무대가 바로 보성의 벌교. 조정래는 이 소설에서 '간간하고 쫄깃쫄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맛'으로 묘사하면서 꼬막을 수차례 언급했다. 꼬막의 성가(聲價)가 소설의 인기와 함께 순식간에 높아졌다.
벌교에 가면 '꼬막정식'을 파는 식당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주말이면 외지에서 그 맛을 즐기려는 식객들과 주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꼬막회무침, 꼬막탕, 꼬막파전, 통꼬막, 양념꼬막, 꼬막탕수육, 꼬막된장국 등 갖가지 꼬막요리들이 한 상 가득 올라 군침이 절로 돌게 하는 것이다.
읍내 인구가 1만5천 명도 채 안 되는 벌교에 성업 중인 꼬막정식 식당은 20여 곳.
이들 식당에 가면 상을 가득 채운 음식들로 바라만 봐도 배가 절로 불러온다. 꼬막 재료의 음식들에다 꼬지생선, 낙지호롱, 부지갱이나물, 쥐포볶음, 유채나물, 새송이버섯, 열무김치, 배추나물, 콩나물 등 10여 가지의 반찬이 맛깔스레 줄줄이 올라온다.
한 식당에서 만난 손님 김기순(63) 씨는 "모처럼 벌교에서 꼬막정식을 먹어보는데 음식은 역시 본고장에서 먹어야 제맛인 것 같다"며 연신 흐뭇한 표정이다.
부부가 남해안을 따라 여행 중이라는 김 씨는 "남편은 맛이 짭조름하면서도 명쾌한 통꼬막을 좋아하고, 나는 갖가지 맛이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꼬막회무침이 좋다"면서 "한 밥상에서 정말 다양한 꼬막 맛을 맘껏 즐길 수 있어 1인분에 1만5천원의 식비가 아깝지 않다"고 만족해한다.
같은 재료라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이다.
제석산 아래의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이 지척인 벌교꼬막맛집의 배영미(48) 사장은 "꼬막 음식은 꼬막을 얼마나 잘 삶아내느냐가 관건이다"라며 "물과 꼬막을 함께 솥에 넣은 뒤 한 방향으로 저으면서 온도를 서서히 높이면 꼬막이 벌어지지 않은 채 싱싱하고 깊은 맛이 그대로 배어 있게 된다"고 비결을 살짝 귀띔한다.
잘 삶아진 꼬막은 껍질을 까도 몸피가 탱탱하게 그대로이면서 반지르르한 물기가 맛깔스럽게 감돈다. 식사의 마지막으로 흰밥에 꼬막회무침, 콩나물 등을 넣고 비벼 먹는 식감은 짜릿하다 싶을 만큼 좋다.
이 같은 맛 덕분에 꼬막은 조선시대에 임금이 즐기는 여덟 가지 진미(珍味) 가운데 일품으로 진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감기 석 달에 입맛이 소태 같아도(떨어져도) 꼬막 맛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 벌교 꼬막 명성은 탁월한 생태여건 덕분
꼬막은 참꼬막과 새꼬막, 피꼬막으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이들은 생김새와 생태 등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사람으로 치면 그 옛날의 '양반'과 '상것' 정도의 차이랄까.
진짜 꼬막이라는 의미에서 '참'자를 앞에 붙인 참꼬막은 표면에 털이 없고 껍데기의 골이 20개 정도로 깊다. 생김새가 크고 미끈한 데다 맛 또한 뛰어나 '제사꼬막'으로 흔히 쓰였다. 대표적 저열량, 저지방, 고단백 식품이 바로 참꼬막이다.
반면에 새꼬막은 털이 나 있고 껍데기의 골이 30개가량으로 얕은 편이어서 참꼬막과 차이가 난다. 맛이 쫄깃하다기보다는 미끄러운 편이라는 점도 참꼬막과 다른 점이다. 성숙하기까지 참꼬막이 4년 이상 걸리는 데 반해 새꼬막은 2년 정도면 충분하다.
이에 따라 값은 당연히 참꼬막에 비해 훨씬 싸다.
제사상에 오르지 못한 새꼬막은 개꼬막, 똥꼬막 등 별의별 이름들이 막무가내로 붙여지기도 했다.
피꼬막은 새꼬막처럼 인공 양식을 할 수 있는데 생산하기가 비교적 쉬운 반면에 맛은 참꼬막보다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껍데기의 골은 40개가량으로 꼬막 종류 중에서 가장 많다. 벌교읍 내 시장에서 팔리는 1kg의 소매가는 참꼬막이 1만8천원, 새꼬막이 9천원이고 피꼬막은 3천원으로 가장 싸다.
벌교 꼬막이 유명해진 데는 해변의 생태여건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뻘 깊이가 평균 15m에 이를 만큼 깊고 뻘의 질이 곱고 부드러워 꼬막으로선 천국이나 다름없다.
전국 참꼬막 생산량의 70% 정도가 벌교를 끼고 있는 청정해역 여자만에서 생산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생태여건이 좋은 만큼 단백질, 비타민, 필수아미노산, 철분은 물론 각종 무기질이 더욱 풍부하다.
참꼬막과 새꼬막은 잡는 방법도 각기 다르다.
참꼬막은 뻘배를 타고 갯벌에 들어가 손으로 일일이 채취해야 한다. 반면에 새꼬막과 피꼬막은 배를 이용해 대량 채취가 가능하다. 그래서 판매 가격은 참꼬막이 새꼬막보다 2배 이상 비싸다. 이는 맛과 영양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산량 차이가 큰 탓이다.
◇ 비표준어로 전락한 '고막', 어떤 사연이 있길래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갯벌에 뻘배를 타고 들어가 꼬막을 채취하는 장면은 애잔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추운 겨울날, 작은 뻘배에 몸을 싣고서 한쪽 발로 푹푹 빠지는 갯벌을 박차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보성 뻘배 어업'은 '제주 해녀 어업' '남해 죽방렴 어업'과 더불어 2015년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됐다.
해양수산부가 지역성과 역사성을 갖춘 꼬막 채취의 전통 방식으로 공인한 것이다.
꼬막 음식을 살펴보는 김에 그 이름의 유래도 더듬어보자.
'꼬막'이라는 용어는 당초 이 지역의 사투리일 뿐이었다. 과거의 표준어는 '고막'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소설 '태백산맥'이 나오면서 판세가 바뀌었다.
조정래가 '꼬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국립국어원은 '고막'으로 정정해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태백산맥'의 위세가 워낙 거세지면서 국립국어원도 두 손 들고 '꼬막'을 표준어로 인정해야 했다.
그 결과 지금은 '고막'이 비표준어로 전락해 찬밥신세가 돼버렸다.
이런 곡절을 알고 벌교에 가서 꼬막정식을 먹어본 뒤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을 찾는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근래 들어 꼬막 생산량은 급격히 줄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1만8천여t에 이르던 연간 생산량이 2010년에는 8천500t으로 급감하더니 지지난해에는 3천500t까지 줄어들었다.
이는 갯벌 양식장에 뿌려지는 종묘의 작황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뿌려지는 양보다 잡히는 양이 현격히 많아지면서 그 균형이 무너졌다는 얘기다.
꼬막 양식은 자연산 종묘에 의존하고 있어 꼬막 종묘의 작황이 줄 경우 생산량도 그만큼 줄 수밖에 없다.
전남지역의 경우 필요한 꼬막 종묘는 연간 1천800t이지만 공급되는 자연산 종묘는 300t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참꼬막은 성장에 4년이나 걸려 한번 균형이 깨지면 이를 회복하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전남해양수산과학원 강진지원 이동근 연구사는 "15년 전 무렵만 해도 연간 1만여t씩을 중국에 수출할 정도였으나 이후 생산량이 급감해 수출이 중단됐다"며 "자연산 종묘의 생산 부진은 자원 남획, 종의 열성화, 기후 변화 등의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꼬막 주산지인 벌교에서는 열리는 꼬막축제가 관광객들을 불러모은다.
15회째를 맞은 지난해 벌교꼬막축제는 10월 28일부터 사흘간 '꼬막 맛 따라 태백산맥 문학 기행을 벌교에서'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꼬막 까기, 뻘배 타기, 갯벌 체험, 갯벌 달리기, 꼬막 시식 행사가 마련됐는데, 향토음식을 즐기면서 조정래의 문학세계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많았다.
![꼬막 채취용 뻘배 [연합뉴스 자료사진]](http://img.yonhapnews.co.kr/etc/inner/KR/2017/01/04/AKR20170104139400805_03_i.jpg)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월호에서 옮겨 실은 글입니다.
ido@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1/14 09:01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