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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청와대와 백악산이연 새 길

등록일2022.07.29 17:46 조회수9451

걷고 싶은 길







청와대와 백악산이연 새 길

글 현경숙 ·사진 진성철 기자 









여기 길 하나가 일어서고 있다 

-문정희-




여기 길 하나가 푸르게 일어서고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켜본

우리들의 그리움 하나가

우리들의 소슬한 자유 하나가

상징처럼 돌아와

다시 길이 되어 일어서고 있다








<청와대 본관 건물 뒤로 보이는 백악산/ 삼청동에서 백악산으로 오르는 길> 





<청와대 관저 앞 산책로 입구>





<백악산 등산로에서 운 좋으면 만날 수 있는 꽃사슴>










청와대를 거닐다 백악산을 걷다


절대 보안 구역이었던 청와대와 서울의 주산인 백악산이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이 변화에는 권력과 시민 사이에 소통과 공감이 활발해져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우기를 바라는 열망이 실렸다. 사람이 자연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부풀었다. 권력의 핵심부였던 청와대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74년 만에 열렸다. 백악산은 1968년 북한의 남파 무장 공작원들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김신조 사건 후 54년 만에 완전히 개방됐다. 


역사와 자연은 변화의 연속이다. 개방된 청와대와 백악산을 걷는 것은 역동적인 역사와 변모하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선사한다. 흔히 북악산으로 불리는 청와대 뒷산의 원래 이름은 백악산이다. 일제는 ‘백악’을 ‘북악’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역사, 문화적 함의가 빠지고 방위 개념만 남은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백악산에는 걷기 좋은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다. 청와대와 백악산 개방 후 청와대 관람객이 줄을 잇고, 백악산 등산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용트림하는 역사와 함께 숨 쉬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살아가는 시민의 약동이 느껴지는 광경이다.





<백악산 청와대전망대에서 바라본 청와대, 경복궁, 서울 시내>





<청와대 관저 입구>










정치와 권력의 상징, 역사와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다


서울은 수천 년 이어져 온 우리 민족 역사 문화의 요람이다. 수도 서울의 역사는 조선 시대 600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서울이 도읍으로서 역할 한 것은 약 2천 년 전인 백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도 서울은 국제도시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서울의 심장부가 청와대였다. 청와대터는 조선 시대에 경복궁의 뒤뜰이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곳은 최고 권력자의 공간으로 사용됐다. 정치의 중심, 권력의 상징이었던 청와대가 큰 변화를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고 이곳을 시민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시민이 역사적 장소를 탐방하고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큰 공원으로 바뀌고 있다. 권력자의 장소, 금단의 땅이 시민의 역사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청와대는 백악산,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 숭례문을 잇는 조선 시대 도읍 한양의 중심축 위에 있다. 청와대가 개방됨으로써 시민들은 숭례문에서 시작해 광화문 광장, 경복궁을 통과해 한양도성이 있는 백악산까지 도보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이 축은 역사, 문화, 국제도시 서울의 관광 여행 ‘1번지’가 되고,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확고히 할 것이다.





<영빈관에서 청와대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문/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바라본 영빈관과 백악산/ 청와대 녹지원>











청와대의 우아한 정취, 풍성한 문화유산


취재진은 햇살이 화사한 6월 초 청와대 정원과 소로, 백악산 탐방로를 이어 걸었다. 햇볕이 제법 따가웠지만 선선한 바람이 넉넉하게 불어줘 더할 수 없이 상쾌한 초여름 아침이었다. 수많은 관람객과 탐방객도 힘든 기색 없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곳곳에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공간 배치가 정치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최고 권위를 간직한 청와대 경내는 전반적으로 우아한 정취를 풍겼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대정원과 본관이 중심 자리를 잡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었던 본관은 1991년 전통 궁궐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분수대 광장에서 가까운 영빈문으로 들어가면 외국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빈 방문 시 공연, 만찬 등의 공식 행사를 열던 곳인 영빈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통령과 그 가족의 거주 공간이었던 관저는 현대식 한옥으로 지어진 큰 생활 건물이었다. 전통 궁궐 또는 한옥을 본떠 지어진 본관과 관저는 국내외 방문객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미를 느끼게 했을 것 같다. 의전 행사, 비공식 회의 등을 진행했던 장소인 상춘재도 단아한 한옥이었다. 한국청년연합(KYC) 소속 김은정 도성길라잡이는 “지나가던 새 한마리가 지친 날개를 살며시 접고 내려앉은 듯한 기와지붕의 관저는 꽤 인상적으로 다가온다”며 “숱한 세월 많은 통치자가 머물렀던 이 공간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건 이곳이 그들의 또 다른 삶, 가족 일상의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히는 녹지원에는 120여 종의 나무와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다. 녹지원 정면 중앙에는 수령 180년 가까이 된 높이 12m, 폭 15m의 한국산 반송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이곳은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으로, 조선 후기 문무의 과거를 보던 장소인 융문당, 융무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청와대 관저>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의 운치 있는 이름을 가진 침류각은 1900년대 초의 전통 가옥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다. 화재에 대비해 물을 담아 두는 용기인 드므가 마당 귀퉁이를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드므’는 순우리말이다. 드므는 명칭도 정겹거니와 우리네 생활 예술의 격조를 엿보게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단 오운정(五雲亭)은 한국의 정자가 얼마나 세련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은 건축이었다. 정자 이름에는 ‘오색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는 뜻이 담겨 있다. 휘호의 유려한 필체가 날기 직전의 학처럼 사뿐히 앉은 목조 건축의 맵시와 잘 어울렸다.

 

미남불로 불리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에 조성된 통일신라 시대 석불이다. 당당하고 균형 잡힌 조형미를 내뿜는 데서 미남불이라는 별명이 붙지 않았나 싶다. 통일신라 불상 조각술의 높은 수준을 알게 하는 문화유산이다. 관저 바로 뒤, 오운정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위치한 큰 바위에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라는 각자가 있다. 중국 남송 시대 사람 ‘오거’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 청와대 일대, 특히 관저가 자리 잡은 곳을 옛사람들은 풍수학에서 말하는 명당, 길지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영빈문 쪽에 칠궁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 왕을 낳았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비롯해 영친왕의 어머니인 귀비 엄씨 등 일곱 분의 사당이 있다.





<청와대 경내에 있는 침류각>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단 오운정/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천하제일복지’가 새겨진 암벽>





<청와대 외곽에서 백악산으로 오르는 길에 보이는 칠궁/ 청와대 분수대 광장>










격변의 현대사 무대


현대사는 중요한 변곡점에서 청와대를 무대로 삼았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청와대의 이름은 경무대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시민들을 향해 최초의 발포가 저질러진 곳이 지금의 청와대 분수대 광장이다. 광장 바닥에는 경찰의 발포로 100여 명이 쓰러진 자리임을 밝히는 동판이 깔려 있다. 동판은 아픈 역사의 과오를 기억해 되풀이하지 말자는 각오를 표현한다. 


1968년에는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대원 31명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정부 요인 살해를 목적으로 백악산으로 침투한 1·21 사태가 일어났다. 경찰과 북한 대원들의 총격전이 청와대 코앞에서 일어났다. 1979년 10월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와대 부지 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을 맞고 숨지는 10·26 사태가 벌어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안가를 헐고 공원을 조성한 다음 ‘무궁화동산’이라고 이름 지었다. 청와대를 국민과 함께 하는 곳으로 만들고, 민주화의 길을 되돌아보는 역사의 배움터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백악정에서 삼청동 쪽으로 향하는 등산로>








반세기 만에 전면 개방된 백악산


1·21 사태 후 물리적으로 단절과 폐쇄의 성격이 더 짙어지고,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 속에서 불통의 대명사가 된 청와대 일대를 대상으로한 개방 노력은 꽤 오래전부터 조금씩 진행됐다. 청와대 경비권역에 속했던 인왕산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대부분 개방됐고, 백악산은 노무현 정부가 공개를 시작했다. 백악산은 숙정문 관람이 2005년 9월 허용되면서 시민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2007년 4월부터는 한양도성 백악산 구간 4.3㎞를 오갈 수 있게 됐다.


문재인 정부는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일부구역만 통행할 수 있었던 백악산의 나머지 지역을 일정을 정해 순차적으로 개방했다. 백악산 북측 면이 2020년 11월에, 남측 면이 퇴임 직전인 올해 4월과 5월에 개방됨으로써 백악산은 김신조 사건 후 약 반세기 만에 시민에게 완전히 열렸다. 다만 환경 보호를 위해 등산객들은 정해진 탐방로로만 다녀야 한다.


4월에 공개된 탐방로는 숙정문∼청운대 쉼터∼법흥사 터∼만세동방∼삼청 안내소를 잇는다. 5월에 개방된 등산로는 칠궁∼백악정∼춘추관으로 이어진다. 청와대, 경복궁, 광화문, 세종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백악정 좌우에는 김대중·이휘호 전 대통령 부부가 심은 느티나무, 노무현·권양숙 전 대통령 부부가 심은 서어 나무가 사이좋게 서 있다.


백악산 남측 면과 북측 면의 탐방로는 연결된다. 새 탐방로는 한양도성 순성길과 맞닿는다. 청와대에서 시작한 등산로는 백악산정상, 한양도성 곡장과 숙정문에 이른다. 탐방로는 북악팔각정을 지나 북한산으로 이어지고, 창의문 안내소에서 인왕산으로 다시 뻗는다. 촛대바위와 말바위 쪽으로 가면 길은 삼청공원으로 내려온다. 백악정 위에 있는 청와대 전망대에서면 앞과 뒤에서 동시에 힘찬 소리가 들린다. 앞에서 올라오는 저음의 웅성거림은 광화문과 세종로가 발산하는 도심의묵직한 함성 같다. 뒤에서는 백악산을 휘감는 맑고 순수한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김은정 도성길라잡이는 “오늘도 말없이 서울을 품은 백악은 천하제일복지를 시민에게 내어준 새로운 변화를 물끄러미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산 청와대전망대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사람들>





<백악산 청와대전망대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사람들/ 백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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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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