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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레이니 데이 인 뉴욕>과 ‘‘샤도네이 와인

등록일2022.08.25 22:31 조회수9997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좋아다 쪽이 정확하려나. 언젠가부터 비는, 특히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비는, 귀찮음과 짜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실은 쾌적한 실내에서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비 내리는 풍경을 좋아하는 거면서, 비를 좋아한다고 수 십 년 동안 주장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나 문학작품, 음악에서는 여전히 비가 낭만의 매개체로 쓰인다. ‘우디 앨런감독의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서 주인공 개츠비(티모시 샬라메)’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Everything happen to Me’처럼, 비 오는 날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법이라고 믿고 싶게 만든다.

 

그런 문장을 믿었던 시절도 있다, 분명. 우산 없이 길을 걷다 누군가 내 머리 위로 드리워준 초록 우산, 우산을 든 이는 공교롭게도 내가 호감을 마음을 품고 있던(혹은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느낌이 딱 내 타입인) 사람,

 

그리고 이어질 우리들의 로맨스 같은 것들을. 하지만 비 오는 날 내 이상형을 '우연히' 만날 확률은 개츠비가 부르는 노래 제목과는 달리 Nothing happen to Me로 수렴된다. 48년을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내린 결론이니 믿어도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째서 비를 좋아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하는 걸까? 왜 비의 낭만에 기대고 싶어지는 걸까? 출퇴근 길 쏟아지는 비에게는 거칠게 짜증 섞인 단어를 내뱉는 나이가 된 지금도 비가 그리는 낭만의 클리셰는 나를 설레게 하니 말이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건조한 일상이 나를 강퍅하게 만들수록 실은 비가 그립다. 비의 촉촉한 낭만을 믿었던 시절의 순수함이.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줄거리 같은 건 무시(?)해도 좋다. 어여쁘기 짝이 없는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줄거리가 뭐 그리 중요한가? 게다가 배경이 뉴욕인 것을! 청춘은 연인의 작은 변화에 전전긍긍하다가도, 우연히 만난 인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지는 일이 허락되는 시기다.

 

뉴욕에 비가 내리고, 그 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우연히 함께비를 맞고, ‘티모시 샬라메가 젖은 머리로 피아노를 치며 그녀에게 쳇 베이커의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의 미덕은 충분하다. 젊음은 불안이 서린 얼굴조차 아름답게 보이는 유일한 시절이다.

 

그들의 불안은 아직 낭만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서. 창 밖의 비만 좋아하는 나는 그렇게 화면 속 낭만에 미소 지을 뿐, 사랑에 흔들리는 그들처럼 더 이상 낭만을 믿지도, 기대지도 않으니까.

 

장마인지 태풍인지 올 여름은 유난히 비가 길다. 나도 모르게 비와 관련된 음악을 찾아 듣고, 비를 떠올리는 영화를 찾아 플레이 시킨다. 거실 창문에도 비가 보이고, TV 화면에도 비 내리는 뉴욕이 보인다.



 

와인 냉장고에서 미국산 샤도네이 와인을 꺼내 한 잔 따른다. 옅은 황금빛을 띠는 차가운 화이트 와인이 글라스에 담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글라스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다. 마치 비 내리는 날 유리창에 맺힌 빗물을 닮았다.

 

샤도네이는 화이트 와인의 대표 품종으로 미네랄 향을 비롯해 사과, 파인애플 등의 과실미와 갓 구운 빵의 아로마가 복합적으로 풍긴다.

 

특히, 미국 샤도네이는 오크통 발효 숙성을 통해 높은 바디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크리미한 질감에 버터, 마카다미아, 바닐라 등의 기분 좋은 향기를 지니며, 다른 나라의 샤도네이 와인보다 산미가 약간 누그러진 모습을 띤다. 청춘의 로맨스를 맛으로 표현하면 미국 샤도네이 와인같지 않을까?

 

젊은 날엔 신 맛이 싫었다. 달고 부드럽고 고소한 것만 선호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맛을 좋아한다. 신맛은 다른 향미를 단정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낭만을 믿으며 여름비를 한 번쯤 무모하게 맞아보는 일이 초래하는 건 감기밖에 없을지 몰라도 감기를 호되게 앓고 나면 면역력이 생긴다. 낭만을 믿는 것과, 낭만을 겪는 일 사이에서 그렇게 아프다 보면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있다. 지나간 청춘의 한 자락이 실은 풋풋한 신맛을 띠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니 조금 더 비의 낭만을, 낭만의 힘을 믿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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