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이 지나도 생각나는 이름은 누구나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짝꿍 이름은 아직도 기억 저편에서 곱게 자리잡고 있다.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의 발이 돼 준 털털거리던 그 차는 가끔 우리를 추억에 잠기게 한다.
여기 모아둔 이 차들은 90년대생이나 2000년대 생은 잘 모른다. 어쩌다 도로에서 '저 차 뭐지?'하며 아주 가끔 보게되는 차들이다. 그러나 30대 이상 아재들의 머릿속에는 추억 속 자동차로 남아있다.
# 1 다이너스티(Dynasty)
현대 다이너스티는 1996년에 나온 차다. 당시 국민들이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지기 시작하면서 도로 위에도 그랜저가 많아졌다. 더 윗급 모델이 딱 필요해진 시점에 나온 차가 다이너스티다.
이 때까지 현대차가 만든 승용차 중 가장 거대한 사이즈, 고급스러운 외관과 기름기 줄줄 흐르는 소재를 듬뿍 첨가한 실내는 과연 현대차의 플래그십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다이너스티는 출시부터 기업 사장님들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 그냥 참고 동네 사장님과 같은 그랜저를 타거나, 큰 돈 들여 외제차를 사야 했는데 더 고급스러운 국산차가 나왔기 때문에 이들의 지갑이 쉽게 열렸다.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많은 대기업 회장님들이 애용했다.
이들의 사랑 덕분에 다이너스티는 '회장님차'라는 명성과 판매량을 모두 얻었다. 비록 3년 만에 에쿠스에게 플래그십 자리 내주긴 했지만,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이상 현대가 아닌 제네시스
▲다이너스티와 다르게 아슬란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현대차는 제네시스 브랜드를 독립시켜 G80과 EQ900을 라인업에서 제외했다. 덕분에 아슬란이 플래그십 모델로 올라섰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다이너스티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 2 마르샤 (Marcia)
1995년 등장한 마르샤는 쏘나타의 고급형 모델이었다. 당시, 그랜저와 쏘나타 사이에 준 고급형 모델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라인업이 풍요롭지 않았기 때문에 두 모델의 심리적 격차가 컸다. 중간층이 비어 소비자 선택권이 넓지 않던 시절이다.
마르샤는 바로 그 간격을 채우기 위해 쏘나타 2를 업그레이드해 출격했다. 뛰어난 디자인 덕에 유명세를 타기는 했지만 정작 시장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마르샤는 쏘나타 2를 업그레이드 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별화를 두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일단, 크기를 더 키울 수 없었고, 당시로서는 고급형 장비를 더 집어 넣는데 한계를 보였다.
가격은 당연히 쏘나타보다 비쌌다. 소비자들이 굳이 마르샤를 선택할 충분한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쏘나타의 고급형이라고 불리는 i40
기대에 못 미친 판매량과는 달리 실구매자들이 내린 평가는 후한 편이었다. 고급스러운 실내와 업그레이드된 주행 감각, 남들과 다른 디자인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 3 갤로퍼 (Galloper)
현대 갤로퍼는 미쓰비시의 명 SUV 파제로를 그대로 가져온 차다. 현대자동차가 아닌 현대정공에서 생산했다. 쌍용 코란도 훼미리(훼 발음이 중요) 등과 함께 국산 중형 오프로더의 주인공이었다.
▲1세대 파제로와 갤로퍼는 디자인 차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갤로퍼가 처음 출시할 때만 해도 아무도 성공을 예상 못했다. 1982년 첫 등장해 풀체인지를 앞둔 파제로를 10년이나 지난 후에 가져온 데다, 일본에서는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후속 2세대 파제로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갤로퍼는 그런 우려를 보기 좋게 날려보냈다. 이미 전 세계에서 검증 받은 파제로의 명성에 일본차를 그대로 들여왔다는 후광효와, 쌍용차에 한정적이었던 오프로드 모델을 현대차에서 만들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후기형이 나오며 성공을 거듭한 갤로퍼는 단단한 차체와 주행 감성으로 그 동안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선사했다.
▲갤로퍼 후속으로 출시한 테라칸, 현대의 마지막 프레임 바디다
성공했다고 아쉬운 것이 없는 건 아니다. 미쓰비시 설계대로 만들어진 갤로퍼는 부분적 현지화가 필수였다. 일단, 운전석 위치를 바꿔야 했고, 이에 따라 트렁크 열림 방향, 주유구, 머플러 위치까지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인도가 아닌 도로쪽으로 열리는 트렁크는 불편하고, 위험했다. 현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미쓰비시에 설계변경을 요청했으나 미쓰비시의 거부로 변경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현대는 독자개발 SUV를 준비하고 있었다. 테스트모델까지 만들어 많은 테스트를 진행했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 했던 결과 때문에 개발을 중단했다는 후문이다.
# 4 엔터프라이즈 (Enterprise)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아마 5-60대 아저씨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차가 아닐까 싶다. 이 차 역시 마즈다에서 설계도를 들여와 일부 디자인을 변경해 생산했다.
1997년 등장한 엔터프라이즈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미 해군 항공모함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출시 당시 가장 큰 배기량과 5m가 넘는 길이로 당시 라이벌이었던 현대 다이너스티, 대우 아카디아와 한판 제대로 붙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승차감에 유리한 후륜 구동에 엘레강스한 디자인으로 뭇 아저씨들의 드림카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판매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당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1997년 IMF사태가 일어난 것, 경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값비싼 고급 세단이 잘 팔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아차는 이 시기 부도가 났다. 망한 회사의 플래그십을 구매할 고객이 있을 리 없다.
▲K9은 당시 잘 나가던 기아가 내놓은 플래그십이었으나 판매량은...
과거 엔터프라이즈의 역할은 K9이 물려받았다. K9은 기아차가 자신있게 내놓은 후륜구동 세단이지만, 이 역시 판매량이 신통치 않다. 엔터프라이즈의 저주일까?
# 5 에스페로(Espero)
1990년, 중형급으로 출시된 에스페로는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인기를 누렸다. 마치 말끔한 수트를 차려입은 것 같은 디자인은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특히 C필러를 검게 채워 지붕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했다. 요즘 유행하는 '플로팅 루프' 디자인이 이미 에스페로에서 시작된 셈. 선글라스를 낀 듯한 뒷모습까지, 많은 이들이 에스페로에 매료됐다.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에서 빚은 디자인은 20년이 지나도 세련미를 잃지 않았다. 0.29Cd를 기록한 낮은 공기저항계수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뛰어난 디자인과는 다르게 성능이나 내구성 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대우차 최초로 자체개발 1.5리터 DOHC 엔진은 초기 품질문제가 대두됐다. 가격도 비싼 편에 속했다.
▲쉐보레 말리부가 있는 한 에스페로는 다시 나오기 어렵다
# 6 아카디아 (Arcadia)
1994년 출시된 대우 아카디아는 대우의 플래그십으로 '가진 자'들의 로망이었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 넓은 공간이 일품이었다. 혼다 레전드를 그대로 들여온 것으로 '일제' 이미지로 어필했다.
아카디아는 현대 그랜저, 기아 포텐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전체 길이는 비슷했지만 전륜구동임에도 불구 앞 오버행이 짧아 후륜구동처럼 보였다.
또한, 앞뒤 바퀴사이 거리가 무려 2,910mm에 달해, 라이벌 그랜저 2,745mm, 포텐샤 2,710mm와 비교하면 한결 넒은 실내 공간을 자랑했다. 아카디아의 등장은 현대 다이너스티와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만들게 한 원인이 됐다.
대우 아카디아는 대형차라곤 볼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운동성능을 자랑했다. 최고출력 220마력을 내는 V6 3.2리터 SOHC 엔진은 230km/h까지 속도를 냈다.
더 신기한 점은 '세로 배치' 엔진이라는 것. 엔진 위치도 최대한 운전석 쪽으로 끌어당겨 사실상 프론트 미드쉽에 가까웠다. 덕분에 무게배분에 상당히 유리했다.
압도적인 실내공간과 운동성능에도 불구하고, 판매실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4,075만~4,330만 원이나 하는 가격 때문이었다. 라이벌 2세대 뉴그랜저가 2,000만~4,400만원까지 다양한 가격대에 팔렸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고가였다.
아카디아라는 이름이 부활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대우자동차는 이제 없다. 완전히 GM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혼다 출신인 아카디아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쉐보레 플래그십으로 자리잡은 임팔라
이미지 :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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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tneksmssj@carlab.co.kr
신동빈 everybody-comeon@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