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연합뉴스) 정주원 기자 = 한국형 누아르 '신세계'로 사랑받은 박훈정 감독의 신작 '브이아이피'가 베일을 벗었습니다. 북한에서 귀순한 거물급 인사를 둘러싼 내부거래를 그린 첩보 수사극입니다. 오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섯 챕터로 나눈 구성입니다.
장동건·김명민·박희순·이종석을 아우르는 호화 캐스팅으로도 화제를 모은 작품입니다.
서울에 동일한 수법의 연쇄살인 사건이 잇따라 발생합니다. 여론의 뭇매로 수사팀장이 자살하면서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집니다. 후임인 '채이도'(김명민)는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서울에 망명 중인 북한 수뇌부의 자제 '김광일'(이종석)을 지목합니다.
그러나 수사팀은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과 미국 CIA 요원 '폴 그레이'(피터 스토메어)의 방해로 번번이 검찰 송치에 실패합니다. 윗선마저 국정원과의 내부거래로 수사를 종결지으려고 합니다. 절망한 채이도 앞에 또다른 귀순자 '리대범'(박희순)이 나타납니다. 이북 보안성 출신인 리대범은 김광일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며 거래를 제안합니다.
박훈정 감독은 연출에 앞서 각본가로 이름을 먼저 알린 케이스지요.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등 굵직한 범죄 누아르의 각본이 그의 작품입니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두 번째 상업영화 신세계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장르 영화의 장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스토리텔링이 강점인 박 감독답게 극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전작 신세계에 비해 스토리의 스케일이 넓어졌습니다. 박훈정 감독표 범죄 누아르의 공통적인 키워드는 복수와 내부거래입니다. 브이아이피는 여기에 '기획 귀순'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첨가하고 북한 이슈를 둘러싼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이권 다툼을 설정해 체스판을 넓혔습니다.
스케일이 넓어진 만큼 난제도 많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첫 번째 챕터의 북한 신은 상당 부분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술이나 조명 등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장치에 신경을 많이 쓴 느낌입니다.
전체적으로 범죄 누아르 장르의 팬이라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신세계의 퀄리티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케일이 커진 반면, 여운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박훈정 감독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무게의 중심이 될만한 연기자를 확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대사가 장황하다면 애드립을 더해서라도 완벽한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는 색깔이 확실한 배우가 이번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브이아이피는 박 감독의 강점과 취약점 모두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과장된 동작과 대사에 지나치게 의존한 연기, 어색한 북한 사투리가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렸습니다. 홍콩 누아르의 오마주로 기대를 모은 장동건의 오프닝 총격신은 촬영에 멋을 부렸지만 다소 어색합니다. 평소 욕을 잘하지 못한다고 밝힌 그답게 욕설 대사는 우리말과 영어 모두 오글거립니다. 김명민의 채이도는 다른 세 주연에 비해 안정적이지만 새로움이 없습니다. 이종석의 첫 사이코패스 연기도 평이해 캐릭터에 맞는 서늘함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박희순은 북한 사투리가 옥의 티이지만, 북한 수사관 역을 실감 나게 연기했습니다. 국정원 간부로 특별 출연한 박성웅은 등장과 함께 시원한 욕설 한마디로 객석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장황한 대사 탓에 긴장감이 흩어진 느낌입니다. 국정원장 역의 주진모는 발음이 부정확해 대사 전달력이 낮았습니다.
무엇보다 피터 스토메어의 색감을 살리지 못한 연출이 아쉽습니다. 스토메어는 미국·유럽·중국을 넘나드는 풍부한 악역 필모그라피의 소유자입니다. 전작인 '존 윅-리로드'의 아브람 타라소프처럼 대사 외의 연기를 살리는 연출을 하지 못해 또 다른 전작인 '태극권2'의 플레밍 공작처럼 현실감 떨어지는 캐릭터로 전락했습니다.
극 중 가장 눈에 띄는 신스틸러는 오대환과 조우진입니다. 오대환은 잔머리와 '귀차니즘'의 대가인 수사관 역을 맡아 김명민과의 찰진 케미로 폭소를 유발합니다. 조우진은 이해관계에 밝은 검사 역을 실감 나게 연기해 짧은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다만 128분의 러닝타임 중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가 범죄의 희생양이라는 설정은 아쉽습니다. 2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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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8/18 20:19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