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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비운의 자동차 EV1

등록일2018.01.08 22:31 조회수5695


▲ GM 'EV1'


1996년 1월 4일.


전기차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봤을 때 꽤 의미 있는 날이다. 굳이 전기차가 아니라 ‘자동차’라는 큰 범위에서 들여다봐도 연표에 점 하나 자신있게 찍을 수 있다.


이 날은 현대적인 양산형 전기차의 시초이자 전기차 역사의 ‘제2장’을 열어젖힌 GM ‘EV1’이 처음 등장한 날이다. ‘제2장’을 열었다는 게 무슨 말일까? 전기차 역사를 잠깐만 들여다보자.


전기차의 등장과 암흑기


놀랍지만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역사가 길다. 독일 발명가 칼 벤츠(Carl Benz)가 내놓은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는 1885년에 등장했다. (견해는 갈리지만) 전기차는 1832년 스코틀랜드 사업가 로버트 앤더슨이 발명한 '원유전기마차'가 시초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에도 한동안 전기차 생산량이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량을 앞섰다.

 

19세기 후반만 해도 전기차가 설 자리는 절대 좁지 않았다. 전기차는 아직 기술이 영글지 않은 내연기관, 무겁고 지속적으로 물을 넣어줘야 하는 증기기관 사이에서 가장 각광받는 탈 것이었다. 


▲ 1832년 스코틀랜드 사업가 로버트 앤더슨이 발명한 '원유전기마차' (이미지 : 위키백과)


물론 당시 전기차도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주행거리가 짧고, 충전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시내 주행 등 단거리 운행에서는 아주 효율적이었다. 포드가 ‘모델 T(Model T)’를 내놓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드가 1908년 내놓은 내연기관 자동차 ‘모델 T’는 자동차 시장을 평정했다. 컨베이어 벨트 도입을 기반으로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포드는 자동차 가격을 획기적으로 끌어내렸다. 이 차는 대중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1927년까지 약 19년 동안 약 1,500만 대 이상 팔렸다. 


충전시간이 길고, 힘도 약했던 전기차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렇게 전기차 역사의 '제1장'은 막을 내렸다.


▲ 포드 ‘모델 T(Model T)’ (이미지 : 위키백과)


그 후 20세기는 ‘전기차의 암흑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간간이 실험적인 모델이 등장하고, 1972년 BMW에서 올림픽 의전용으로 ‘1602e’라는 전기차를 선보이기는 했지만, 이벤트성 모델이었을 뿐 대중들에게 팔리는 양산차는 아니었다.


▲ 1972년 BMW에서 올림픽 의전용으로 선보인 전기차 ‘1602e’ (이미지 : BMW)


최초의 대량 생산 전기차 EV1의 등장


그렇게 대중들과는 거리감이 있었던 전기차는 20세기 말, 미국에서 발의된 한 법으로 인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무공해 자동차 판매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 법안은 회사별로 판매량에 따라 무공해 자동차를 일정 비율 이상 판매하도록 규정하고, 미달 시 과징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미국 자동차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던 GM 역시 이 법안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탄생한 게 ‘EV1’이다.


▲ EV1은 향후 전기차 보급에 대한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준 모델이다


EV1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자발적인 개발 의사로 태어난 차는 아니지만, 자동차 역사를 통틀어 처음 등장한 대량 생산 전기차다. 전기차 역사 '제2장'의 시작이자, 향후 전기차 보급에 대한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준 모델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대충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사실 꽤 많이 공을 들였다. 가벼운 알루미늄 뼈대를 사용하고, 차체 곳곳에 마그네슘이나 경량 강화 플라스틱 등 비싼 소재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90년대 개발된 전기차 치고 성능도 꽤 괜찮았다. 초기형은 1회 충전 시 약 200km까지 달릴 수 있었고, 후기형은 300km까지도 달릴 수 있었다. 최고속도는 약 150km/h, 100km/h 가속은 10초 이내였다. 현재 판매되는 모델들과 비교해 봐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1,117대가 생산될 정도로 판매량도 준수했다. 가격도 3만 4,00달러로 당시 신기술이 집약된 혁신 제품임을 감안했을 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도 아니었다. 판매 방식도 차 값을 3년간 나눠서 내는 리스 형식이었기에, 구매 부담도 덜했다.


충전 여건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전기차 충전소 약 150여 개가 준비돼 있었다. 그렇게 전기차가 다시 각광을 받는가 싶었다.


▲ EV1은 현재 판매되는 모델들과 비교해 봐도 성능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비운의 전기차 


결론부터 말하면 EV1은 2002년 전량 폐기됐다. 도대체 이 차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자동차 회사들이 ‘무공해 자동차 판매 의무화 법안’ 관련 소송에서 승소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회사들은 개발비 비싼 전기차 대신, 하이브리드나 천연가스차 판매로 절충안을 이끌어냈다. 


▲ 임대됐던 EV1은 전량 회수돼 2대만 남기고 전량 폐기됐다


GM으로써도 적자를 봐가면서까지 EV1을 끌고 갈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그렇게 EV1 프로젝트는 종료됐고, 임대됐던 EV1은 전량 회수돼 2대만 남기고 전량 폐기됐다.


이 과정에서 전기차 인기에 위기를 느낀 정유회사들의 로비활동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내용을 담은 ‘누가 전기차를 죽였는가?’라는 영화도 나왔을 정도다. 사실이라면, EV1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전기차'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당시 GM이 EV1을 계속 판매했더라면, 지금쯤 전기차 업계에서 제일 가는 일등 기업이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지 : GM, 위키백과, BMW

황창식 inthecar-hwang@carla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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