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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의 계절에 더욱 좋은 세계유산, 공주 마곡사

등록일2019.06.20 13:13 조회수11644








공주는 이제 명실상부 세계유산의 도시다.


2015년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과 공산성이 백제역사 유적지구에 포함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지난해에는 마곡사를 포함한 7개 사찰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세계유산이 됐다.


신록의 계절, 어딘들 좋지 않으랴마는 세계유산 산사를 처음, 혹은 새로 돌아볼 계획이라면 이 계절에는 마곡사다.










세계유산이 된 7개 사찰은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활동과 수행을 지속해서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불교 승원이다.




천왕문 앞에 쌓인 돌탑




도시에 세워진 사찰 대부분이 조선시대에 폐사됐지만, 산지 사찰들은 그 기능을 이어왔다. 자연에 순응해 가람 배치가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것이 특징이다.


마곡사 역시 태극 모양으로 휘어 흐르는 마곡천이 남원과 북원으로 나눈다.




표암 강세황이 쓴 대광보전 현판




대지가 좁은 북원의 중심 건물인 대광보전은 지형의 흐름에 맞춰 서남향을 향하고 남원의 중심 건물 영산전은 동남향을 향해 서로 교차한다. 해탈문과 천왕문이 그 사이에서 방향을 적절하게 틀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


마곡사는 많은 화승을 배출한 남방화소이기도 하다. 승병의 집결지였던 마곡사는 일본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봤지만 전란 후 대규모 야외 법회가 열리면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이것이 전후 복구에 큰 역할을 했다.




해탈문 옆 고목에는 꽃 대신 연등이 피어있다




17세기 대규모 야외 법회가 대중화하면서 대형 불화인 괘불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초기 뛰어난 작품들이 마곡사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에서 제작돼 동남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조선말 마곡사에 머무는 승려 300명 중 불화를 배우는 승려가 8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태화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은 마곡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우선 ‘마곡사사적입안’은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다녀온 뒤 643년 선덕여왕의 후원을 받아 세운 7대 가람 중 세 번째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신라 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됐다가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고 대가람을 이루었다 한다.


 


마곡사 현판. 근대 서화가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마곡사'라는 이름은 보철 화상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麻)처럼 많이 모여든 데서 유래했다 한다. 그러나 중국의 마곡 보철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신라 말에 보철의 법을 받아온 무염 대사가 스승을 기리기 위해 마곡사라는 절을 개창했다고도 한다.




세조가 남긴 영산전 현판




수행 공간인 남원에는 현재 마곡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영산전이 있다.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영산전 현판은 마곡사에 들른 세조가 써서 남겼다.




남원의 중심 건물인 영산전(정면)과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다는 매화당




영산전 옆 매화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이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뒤 이곳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에 김시습이 먼저 떠나고 없자 세조가 ‘김시습이 나를 버렸으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며 두고 간 가마도 마곡사에 있다.










극락교 건너 북원에는 가장 높은 곳에 대웅보전이, 그 아래 앞마당에 대광보전과 오층석탑이 일렬로 자리 잡았다.


대웅보전은 밖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 한다.




대광보전의 삿자리




대광보전 바닥 장판을 걷어 올리면 참나무로 짠 삿자리가 깔려있다. 이 삿자리에는 걷지 못하던 자가 백일기도를 드리는 동안 정성으로 삿자리를 짜고 마지막 날에는 제 발로 걸어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오층석탑의 상륜부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보이는 금동보탑이 올려져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층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은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지만, 꼭대기 상륜부에 금동보탑이 올려져 있다. 이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 말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군인을 살해하고 옥살이를 하다 탈옥해 삼남 지방을 떠돌다 마곡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김구 선생이 출가할 때 머리를 깎았던 자리




‘백범일지’에는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 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고 기록을 남겼다.




마곡사 앞마당에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백련암과 백범당, 마곡천 옆 삭발 바위와 징검다리, 송림욕장 등을 잇는 백범명상길을 조성해 놨다. 해방 후 마곡사에 들른 김구 선생은 대광보전 기둥의 주련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앞마당 왼쪽에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해방 후 마곡사를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의 기념사진




백범당에는 이 주련이 똑똑하게 보이는 앞마당에서 찍은 사진, 김구 선생의 진영과 함께 생전 즐겨 쓰던 휘호도 걸려 있다.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로 김구 선생의 친손자인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 마곡사에 기증했다.





글 한미희 · 사진 전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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