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양=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 하지만 그저 서운해할 일만도 아니다. 세상만사가 거자필반(去者必返)이다. 떠난 이는 반드시 돌아온다. 겨울과 봄이 줄다리기로 진퇴의 승부를 겨루는 2월. 하지만 매서운 기세의 동장군도 결국 후일을 기약하며 부드러운 몸매의 봄처녀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 눈과 얼음 작품으로 마지막 겨울을 장식한 칠갑산 얼음분수축제장에서 덧없는 시간의 흐름과 묘미를 느껴봤다.

◇ 작은 겨울왕국 '충남 알프스마을'
“야, 멋지다!” “마치 동화나라 같네!”
축제장에 들어선 방문객들이 저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탄성을 터뜨린다. 시립(侍立)하듯 늘어선 얼음분수들과 동화나라에서 막 나온 듯한 캐릭터 작품들이 반갑게 손님을 맞는다. 서울 한복판의 광화문광장도 재현돼 기묘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봄의 어귀인 입춘(立春)이 지나고 대표적 세시명절 정월 대보름날인 지난 2월 11일. 겨울의 마지막 길목이어서인지 칠갑산의 알프스마을은 아쉬움을 추억으로 남기려는 발길들로 붐볐다. 전국 곳곳에 한파특보와 대설특보가 발효된 날. 체감온도는 뚝 떨어져 영하 10도 안팎을 오르내렸다. 동장군은 칠갑산 계곡에서도 늦겨울의 칼바람으로 기승을 부렸으나 방문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의 묘미를 한껏 만끽했다.
충남의 산소탱크로 불리는 청양군의 칠갑산.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해발높이 561m의 명산이다. 이곳 칠갑산은 만물생명의 7대 근원인 ‘칠(七)’자와 육십갑자의 첫 번째인 ‘갑(甲)’자를 조합해 생명의 으뜸 발원지임을 뜻하는 명칭이라고 한다.
알프스마을이 있는 정산면 천장리는 칠갑산의 동쪽 계곡에 아담하게 자리한다. 마을 이름인 ‘천장’은 동네가 천장(天障)처럼 높다고 해 붙여졌단다. 이곳에서는 2008년부터 겨울마다 얼음분수축제가 열려 전국의 방문객들을 불러 모았다. 충청지역에서 개최되는 유일한 눈과 얼음 소재의 겨울축제. 알프스마을 38가구의 주민 90명이 힘과 지혜를 모아 두 달가량 멋진 겨울나라를 연출한다.
칠갑산 얼음분수축제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 순수 민간단체가 주도해 진행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마을주민들로 이뤄진 ‘알프스마을 운영위원회’는 주민 주도적 자립형 축제를 해마다 열어왔다. 방문객은 매년 20여만 명. 조그만 시골 마을이 전국의 참가자를 두루 불러 모으는 비결이 절로 궁금해진다. 이번 제9회 축제는 지난해 12월 24일부터 2월 19일까지 두 달 가까이 계속됐다.
◇ “동화나라 친구들 모두 모여라!”
축제장에서 먼저 손님을 반기는 것은 실개천을 따라 늘어선 얼음분수와 눈조각, 얼음조각 등 각종 볼거리였다. 이들은 마치 겨울 조각작품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얼음분수들. 높이 10~15m의 얼음분수 작품들은 기다란 고드름을 종유석처럼 줄줄이 늘어뜨린 가운데 우람한 기상으로 당당히 서 있었다. 작품마다 머리 정수리 부분에서는 나팔 모양의 분수가 가느다랗게 솟구쳐 얼음의 두께를 시나브로 키워나갔다. 물과 바람과 추위가 삼위일체로 만들어낸 한겨울의 걸작들. 모두 51점의 작품은 저마다 신비한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뽀드득 소리가 경쾌한 새하얀 눈길을 사부작사부작 걷노라니 낯익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종의 기시감이랄까. 이번 축제의 주제인 ‘광화문 광장’이 구현된 눈조각 마당이다. 청와대와 광화문, 세종대왕상, 이순신장군상이 언덕 위에서 아래로 차례차례 늘어섰다. 그 사이에는 소년과 소녀의 두상 작품도 각기 설치돼 주목받았다.
알프스마을은 그해의 최대 이슈를 축제 핵심으로 형상화해왔는데, 이번에는 촛불집회로 몇 달째 국민적 관심을 모아온 광화문광장을 작품으로 만들어 선보였다. 전시작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소년상과 소녀상.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들 대형 작품은 활짝 웃는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바라보며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이었다. 축제 기획팀의 오규옥 대리는 “작품에는 긴장과 갈등을 하루속히 청산하고 모두가 함께 밝고 편안하게 웃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겼다”고 들려줬다.
정유년 닭띠해를 맞아 한 쌍의 닭이 마주 보며 방문객을 반기는 얼음작품과 병아리 3마리를 이끌고 눈길을 정답게 걸어가는 부부닭을 형상화한 눈작품 등 닭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이채로웠다. 작품 앞에서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은 조명순(61ㆍ대전) 씨 부부는 “동갑내기인 우리는 둘 다 닭띠에요.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했답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뽀로로, 라바, 로보카 폴리 등 동화 속 작품도 눈과 얼음 작품으로 전시돼 어린이들을 더욱 즐겁게 했다. 북극의 이글루와 스위스의 얼음동굴이 재현돼 환상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왔다는 김정화(40ㆍ수원) 씨는 “동화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애들이 좋아하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며 흐뭇한 표정. 이글루 안에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얼음을 만져보던 김하경(13ㆍ청양) 양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아늑하고 따뜻해요. 우리 가족에게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 될 거예요”라며 활짝 웃었다.
주말마다 밤이 되면 이들 작품은 다채로운 조명으로 더욱 화려한 신비감을 선사했다. 빨강, 파랑, 초록 등 다양한 불빛이 얼음분수와 전시조각들에 아름답게 투영돼 겨울왕국의 한밤 별세계를 연출한 것이다.

◇ “어린 시절 썰매 탔던 추억 속으로”
눈 조각과 얼음조각의 구간을 지나자 신바람 넘치는 눈썰매장과 얼음썰매장이 펼쳐졌다. 이들 놀이공간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또 다른 동심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눈썰매의 경우 S자형 눈썰매, 콩콩이 눈썰매, 바이킹 눈썰매 등 종류가 다양했다. 얼음썰매와 얼음 봅슬레이도 추억의 향수와 속도의 쾌감을 각각 맛보게 했다. 비료포대를 타고 비탈길을 신나게 미끄러져 내리는 썰매장 또한 환호성으로 떠들썩했다.
동생과 함께 차례로 비탈을 타고 내려온 강소리(13ㆍ청주) 양은 “엄마, 아빠가 가르쳐주신 대로 탔는데 아주 재밌어요. 또 탈래요”라며 썰매를 들고 비탈길을 종종걸음으로 다시 올라갔다. 아빠 임태영(43) 씨는 “어린 시절에 썰매 탔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며 흡족한 표정. 옆의 봅슬레이장에서 얼음비탈을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온 최예인(11ㆍ고창) 양은 “무섭지 않으냐”고 묻자 “하나도 안 무서워요. 처음인데 아주아주 신나요”라며 연신 싱글벙글한다.
축제의 즐길거리로는 빙어낚시, 빙어뜨기, 짚트랙, 승마체험, 소썰매, 이앙기 썰매 체험 등이 있었다. 축제장 입구의 실개천 얼음판에서 즐기는 빙어낚시는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얼음구멍에 낚싯줄을 드리워놓고 빙어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다른 체험장인 빙어뜨기는 커다란 어항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빙어를 뜰채로 잡아 올리는 것. 빙어낚시를 하던 박재현(47ㆍ청주) 씨는 “계곡이라 그런지 바람이 아주 찹니다. 30분 동안 겨우 두 마리를 잡았어요. 낚시는 초보인데 이 역시 스킬이 필요하나 봐요”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이 든 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알밤 구워 먹기. 참나무 장작더미가 쌓인 마을회관 앞마당에서는 불길 위로 기다란 쇠바구니 도구를 흔들면서 밤을 굽는 손놀림들이 바빴다. 뜨거운 열기의 장작구이는 추위도 몰아내고 입맛도 즐기는 일거양득의 한마당이었다. 장인, 장모, 처제 등 처가 일가족과 함께 왔다는 강흥탁(44ㆍ제주) 씨는 “참나무에 직접 구워 먹으니 손맛과 입맛이 더 특별한 것 같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라며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다. 옆자리의 유문상(63ㆍ통영) 씨도 “장작불을 보니 어린 시절에 부엌에서 나무로 불을 때던 생각이 난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충청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겨울축제가 9년 연속 개최되고 있다는 점에서 칠갑산 얼음분수축제는 유독 관심을 모았다. 비결은 천장리 알프스마을이 찬바람 강한 골짜기에 위치한 데다 산자락의 경사가 심해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다. 그 덕분에 눈과 얼음 작품이 잘 녹지 않는다는 것. 이 마을의 황준환 대표는 “주민이 합심해 방문객들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눈과 얼음 작품은 축제 기간에 세 번 정도의 유지·보수 작업을 정성껏 벌여 그 원형을 최대한 간직하게 한다”고 말했다.

◇‘콩밭 매는 아낙네상’보니‘콩밭 매는 아낙네야~’절로 흥얼
축제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볼거리들이 많아 축제를 즐기면서 관광명소도 구경하는 기쁨을 두 배로 누릴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천장호 출렁다리. 청양의 대표 명소인 천장호 출렁다리는 길이 207m, 높이 24m, 폭 1.5m로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로 유명하다. 청양을 상징하는 높이 16m의 고추 모형 주탑을 지나 호수 위를 걷노라면 칠갑산과 천장호수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다. 호수 공원에 서 있는 ‘콩밭 매는 아낙네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하는 노래 ‘칠갑산’을 절로 흥얼거리게 한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두 개의 대웅전이 있는 장곡사, 애국지사 면암 최익현의 영정이 봉안된 모덕사, 국내 최대의 굴절망원경이 설치된 칠갑산 천문대도 둘러볼 만했다. 장곡사 입구에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승인 칠갑산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높이 11.5m로 솟아 있는데 이는 축제장의 거대한 얼음분수 작품과 형상이 비슷해 묘한 인연을 느끼게 한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과 봄이 장엄하게 연출하는 바통 터치의 시간! 지금의 생생한 모습은 부단한 시간의 흐름에 밀려 과거의 아련한 추억으로 서서히 탈바꿈해갈 것이다. 기승을 부린 AI(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 파문 속에서도 겨울축제들은 비교적 원만히 막을 내린 가운데 전국의 산야에는 어느새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온다. 칠갑산 얼음분수축제도 추억을 남긴 채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겨울의 그날을 다시금 기다릴 터. 앞으로 칠갑산에서는 여름날의 세계조롱박축제와 가을날의 콩축제가 차례로 열려 알프스마을의 올해 축제장을 흥청거리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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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3월호 [축제]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3/06 08:01 송고